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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 익히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이지만 사실 소설을 잘 읽지는 않는 나에게는 이 사람이 왜 유명한지는 솔직히 모른다. 여러 소설작을 접하지는 않았던 나에게 그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그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는 알 수가 있었다. 간혹 어려운 문장들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쓰쿠루의 목소리와 생각을 있는 그대로 써내려간 문장들이 내 생각의 흐름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질적이지 않았던 구성으로써 소설을 많이 접하지 않은 내가 읽기에도 적절한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와닿았던 부분들은, 쓰쿠루처럼 한번쯤 내가 어떤 색깔로 기억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기 때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단순하게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색채 때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각자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외모나 목소리, 성격, 행동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요소로 설명될 수 있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그런 것들이 특히 첫인상에 반영된다고도 생각했다. 읽으면서 이 작가가 내 생각에 공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책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 속에 충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어색하고 서툴렀을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



비록 그는 아무런 색깔을 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색깔을 가지지 않았기에 모든 색깔을 가질 수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까. 다자키 쓰쿠루에게는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름으로써 정해진 자신의 색은 결국에 그 색깔에 갇혀버릴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확실히 다른 그의 친구들보다 쓰쿠루가 좋든 나쁘든 그러한 특징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그만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펼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람은 본래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혼자 일어서는 힘을 배우게 된다고 하는데, 주인공 역시 이런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모토 사라에게서 그의 인생은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사라는 쓰쿠루를 사랑하는 마음에 주인공이 고등학교 때 친했던 네 명의 친구들을 만나라고 종용하게 된다. 어쩌면 쓰쿠루에게 가장 필요했던 행동은 그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사람과 관련된 마음의 병을 고치려면 다시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어떤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그 네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해...(중략)" -



 쓰쿠루는 자신과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의 행동의 의미를 찾아가 알아가면서 읽는 나도 그들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었다. 먼저 아카가 말했듯이, 인간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직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모순적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중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세상은 정직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많은 것 같다. 오히려 '정직'이라는 것이 빛을 발하는 이유가 '정직하지 않음'이라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은 본래 어떤 구성원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보통 '혼자' 라는 개념과 상반되는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같지 않는 '혼자'가 일상이 되어가 버린다. 효율성과 경제성이 사회의 주된 관심사이다 보니 끈끈한 우정같은 감정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 같다. 이런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고 짠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고 있는 그 때일 뿐 평상시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쓰쿠루가 느꼈던 감정은 정말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 

그건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감각이었어."



 에리가 핀란드로 떠나 자신의 삶을 정착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가끔 견디기 힘든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해외로 가는 경우가 있다. 경중의 차이가 있지만, 에리는 자신의 친구에 대한 슬픔을 애써 이겨내기 위했기에 아예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난 거라 생각한다. 한번 여행을 간 경우가 있었는데, 현실에서 너무 지쳐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공감이 되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네 명의 친구들은 쓰쿠루에게서 떠나게 되었다. 쓰쿠루는 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마음의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사라에게 하고 싶은 고백이 아닐까 싶다. 결말 부분에는 거절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 그 정도의 두려움은 갖고 있다. 하지만 쓰쿠루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결말은 분명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그는 인생의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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